<스포일러 대량 함유.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기억을 위한 정리글>
타겟이 명확한 노림수
관람 후, 프로그램북을 펼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지이선 작가의 말에 쓰인 '고백하건데 나는, 예상했다. 남자만 4명 나오는 공연, 거기에 수트 입히면, 뭐가 되든 될거 란거 알고 있었다.' 를 보고 나니. 맞다. 포스터나 홍보 문구에서 약간의 거부감이 든 부분이었다. 재능 충만한 남자 배우들이 등장해서, 교복을 입고 엘리트의 모습을 보여준다니. 이처럼 훌륭한(여성에게 특화된) 포인트가 어디있는가!
괜찮다는 평을 많이 들어서 궁금했더랬다. 뻔한 이야기를 얼마나 맛있게 조리할 것인지. 일단 극은 예상한 만큼 충분히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익히 생각할 수 있는 범생이들의 성적 스트레스, 컨닝 모의, 열등생의 합류, 회유와 협박 그리고 응징. 순간 순간 적절하게 터져주는 개그와 (제 아무리 슬픈 주제라 한들 80%는 개그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 멀끔한 배우들의 혈기 왕성한 고교생다운 연기, 그럴 법한 캐릭터들끼리의 캐미. 그런데 왜 다 보고 났을 때 좀 씁슬했을까.
하우스에서 키워낸 철 지난 이야기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 재수하면 오지선다의 수능으로 넘어가니 올해 안에 승부를 봐야하는 아이들. 외국어 고등학교 독일어과의 명준은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을 시도할 정도다. 제주도에서 상경해 함께 공부하는 수환이 요즘 분야를 나눠서 공부하고 컨닝하는 방법이 있는데, 답안지를 사는 애들 보다야 낫다는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고는 수학 분야의 컨닝을 도모한다. 화장실에서 방법에 대해 논하다 야구선수 생활 중 폭력사태로 1년 꿇고 전학을 온 졸부집 아들 종태에게 걸리고, 컨닝을 포기할 수 없는 명준은 친구가 되어주겠다며 종태까지 끌어들인다. 시험을 준비하던 중 담임과 반장만 들고 다니는 출석부에서 돈봉투가 나오고, 아이들은 전교 1등인 반장 민영을 협박한다. 무죄임을 호소하는 민영을 믿지않는 아이들. 그러나 소문은 반 전체에 퍼지고 결국 아이들은 민영이 받은 답을 오답과 섞어 기침하기, 머리 긁기와 같은 표시로 적절하게 아이들에게 가르쳐준다. 하지만 이미 민영이 모든 아이들에게 정답을 가르쳐준 덕에 종태를 제외한 반 전체가 100점을 맞아 재시험에 돌입하게 된다.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던 명준은 민영에게 무릎까지 꿇는다. 재시험때 다시 가르쳐달라며. 이번에 1등급이 안되면 자기는 끝이라며. 하지만 민영은 조소를 날린다. 네가 3%라면 자신은 0.3%라며. 컨닝 사건의 처벌이 두려운 아이들은 우정을 빌미로 종태를 설득한다. 종태는 홀로 십자가를 지는데, 도움을 주겠다던 명준과 수환의 반성문은 종태를 상처입히는 말들로 가득하다. 십여년이 지난 후, 결혼식장에서 만난 명준은 회계사, 수환은 정치인의 보좌관이, 종태는 공업사(카센터) 사장이 되어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아이들. 종태는 여기서 너희를 만날 줄 알았지만,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한다. 여기는, 검사가 된 민영의 결혼식이다.
아, 나는 이미 예매창에 드러난 스토리에서부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냄새를 맡았다. 그건 87년작이잖아(..) 학력고사라니, 외고 다니는 범생이들이라니. 학교에서 2등급, 3등급이었는데 회계사에 보좌관이고 모텔 다닌다고 '우리쯤 됐으면 호텔 좀 다니자'라니. 어따 팔아먹으려고 공감 포인트는 다 날렸나. 답안지 거래보다 컨닝이 낫다, 고 합리화하는 순간에서부터 글러먹었다. 정말 똑똑한 애들이었다면 차라리 좀 더 영악하지 그랬나. 카이스트 중퇴 출신 연출이라 언플하는 것이 역효과 아닐까. 철 지난 이야기를 하우스에서 열심히 키웠는데, 그러다보니 비싸졌고 깔끔하고 고급스러워지긴 했는데 그 태생적 한계에 부딪히니 아무리 색칠을 한들 예뻐지거나 좋아질리가 있나. 그냥 딱 한마디로
내 취향 아니다. 이런 얘기, 참 재미 없다.
공연을 왜 보는가?
모범생들, 장점 분명히 많다. 작은 무대에서 책걸상을 활용한 역동적인 전환, 수트에서 카라를 뒤집고, 넥타이를 바꿔 매고 명찰을 끼면 교복으로 변신하는 아이디어, 올린지 얼마 안됐음에도 불구하고 (2월 3일 개막) 착착 맞는 배우들의 합, 뜨거운 연기, 내가 좋아하는 말장난 개그 등등. 그런데 뭐가 이렇게 별로였냐고 묻냐면 결국 그냥 스토리가 나와 맞지 않았던 것일 테다. 2012년에 이 극이 줄 수 있는 영향이 무엇일까. 품은 메시지가 신선한가? 혹은 매서운가? 아니면 감동을 주기라도 하나?
사람마다 공연을 보는 이유가 다르겠지만. 나는 충분히 재미를 느끼고 싶어서 본다. 분명히. 되도록 좋은 걸 보고 추천해주고 싶은 마음인데. 그래야 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올 테니까. 무조건 까려고 보는 게 아니란 말이다. (실제로 스팸어랏 난 매우 재미있게 봤다 <- 원작 영화 팬인데!) 그런데 자꾸 그런 부분이 눈에 띄면 참기가 어렵다 TㅅT 본지 2주가 다 되어가는데 이제사 쓰게 된 것도 내키지 않아서인데.
배우 핥기에는 참 좋은 공연이다. 가깝기도 하고, 보여주는 것도 많고. 명준-이호영, 수환-김종구, 종태-김대종, 민영-김대현 캐스팅으로 봤는데 꽤 좋았다. 이호영씨는 2009년부터 이 극을 해와서 그런지 잘 녹아있고, 김종구씨는 빨래의 솔롱고 역 이후 두 번째로 봤는데 역시 잘한다. 빨래가 워낙 좋은 작품으로 기억되어 플러스 된 부분도 있겠지만. 수환이 어찌나 귀엽고 얄밉던지. 송창의 같은 분위기도 있는 듯. 김대종씨는 진짜 종태역에 딱인듯. 워낙 또래 배우들에 비해 노안이라(..) 우려했는데 오히려 설득력있더라. 김대현씨는 왕세자 실종사건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무난하게 기억되는 듯. 사실 이런 분들이 나중가면 무섭더라. 무슨 캐릭터든 다 해내서.
까불거리며 가벼운 극은 싫고, 그렇다고 너무 무거운 것도 싫다면 적당히 문제의식도 있고 재미도 있으며 소화하기 무리 없으니까. 그럭저럭 추천.
티켓 인증.
공짜로 본 주제에 말이 많다고 생각하면 경기도 오산. 나름대로 보고 싶어서 성실히 이벤트 응모해 타낸 티켓이었음. 그런데 초대권 많이 뿌렸는지 이날 만석이었음. 아트원은 뭐 어디서 보나 잘보이니. 핥으려면 역시 1열이 갑이겠지만.